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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 97주기였습니다

뷰포인트 2017.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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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간 땅, 그 땅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은 영혼마저 철저히 파괴당하고 유린당했습니다. 조국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컸던 국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유관순 열사도 그중 한 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97년 전 어제는, 목에 피가 송골송골 맺히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신 날입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시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 감옥에서 투쟁 중 순국하셨는데요.

 

(▲어린 시절의 유관순 열사)

 

당시 이화학당의 학생 신분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교장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복순, 서명학, 국현숙, 김희자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고, 건장한 성인 남자들도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당하셨죠.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는가 하면, 마치 위내시경을 하는 것처럼 입에 호수를 꽂아 뜨거운 물이나 변을 들이부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군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흉악한 고문 세례를 퍼부었죠.

 

조국을 되찾겠다는 열일곱 소녀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참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주동자는 오직 자신뿐이니, 죄 없는 사람들은 석방하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고문을 1년 넘게 버티시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셨는데요. 사실 유관순 열사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지난 2010년 108세로 작고하신 독립운동가 남동순 선생은 유관순 열사와 동네 친구였다고 합니다.

 

 

남동순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는 또래의 친구들처럼 장난기 많고 웃음이 많던 친구라고 기억했습니다. 단지 조국을 잃었다는 이유로, 조국을 되찾겠다는 이유로 유관순 열사는 그 먼 길을 떠나가신 겁니다.

 

 

올해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나라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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