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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웨더가 나타나기 전 '핵주먹'이라 불린 사나이

뷰포인트 2017.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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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계획이란 것을 갖고 있다. 입에 주먹이 한 방 꽂히기 전까지는" - 마이크 타이슨

 

 

복싱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마이크 타이슨'입니다. 상대 선수의 얼굴에 빠르고 강하게 꽂히는 펀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프로 통산 전적 50승 6패 2무효 중 44번은 KO승이었습니다.

 

 

(▲사고뭉치였던 어린 시절의 마이크 타이슨)

 

어린 시절 비행을 일삼던 타이슨은 불과 10살의 나이에 갱단에 들어가 폭력과 강도 등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습니다. 사고만 치고 다니다 보니 소년원을 밥 먹듯이 들락거렸죠. 그런 그에게 운명 같은 만남이 찾아오는데요.

 

(▲마이크 타이슨과 복싱 트레이너 바비 스튜어트)

 

폭력 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소년원에 들어갔는데, 당시 소년원의 복싱 트레이너였던 '바비 스튜어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마이크 타이슨과 커스 다마토)

 

복싱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타이슨의 재능을 알아본 바비 스튜어트의 설득으로 최고의 트레이너인 '커스 다마토'를 만나 복싱을 시작하게 되죠. 커스 다마토는 타이슨의 훌륭한 스승이자 양아버지로서 타이슨에게 열정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원래 커스 다마토의 꿈은 복싱 선수였지만, 12살 때 불량배와 싸우다 한쪽 시력을 잃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싱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던 그는 선수가 아닌, 트레이너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겁니다.

 

(▲타이슨의 강력한 펀치와 주특기였던 체중을 이용한 무빙)

 

사실 타이슨은 헤비급 복서로서는 작은 키(178cm)입니다만, 그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스피드와 파괴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가 연습할 때면 복싱 코치들은 강제로 극한직업을 경험해야 했죠.

 

 

타이슨은 1985년 프로로 데뷔한 이후 압도적인 스피드와 펀치의 파괴력으로 연승을 이어가다가 1986년, 불과 스무 살의 나이로 WBC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 언론에서는 "핵주먹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주먹에 쓰러지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며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중 1985년, 복싱 스승이자 아버지였고, 인생의 멘토였던 커스 다마토가 사망합니다. 한 토크쇼에서 타이슨은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타이슨을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던 커스 다마토가 사망하자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어린 양처럼 제대로 된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변에는 타이슨을 이용해 돈 벌 궁리만 하는 사기꾼과 아첨쟁이들이 득실거렸고, 그것에 취해 사치와 방탕에 물들어갔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인생이 늘 그렇듯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는 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1990년 2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WBC, WBA, IBF 헤비급 통합타이틀 전에서 무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던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10회 KO라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죠. 그 전까지만 해도 37승 무패의 기록을 달성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는 범죄를 저질러 3년간 옥살이를 하는가 하면, '에반더 홀리필드'와의 리매치에서 복싱 역사에 다시 없을 귀를 물어뜯는 기행을 벌이기도 합니다. 팬들은 그를 핵주먹이 아니라 '핵이빨'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는데요.

 

 

만약 커스 다마토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타이슨 그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와 스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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