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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강국 독일에서 전설로 인정받은 말벅지의 사나이

뷰포인트 2017.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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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근대 축구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인 19세기 말부터입니다. 고대사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놀이 형태의 공차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정식 축구 경기는 1906년 3월에 서울 삼선평(성북구 삼선동과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의 마을)에서 열린 횡성기독청년회 간의 시합이었습니다. 그 후 1921년 제1회 전 조선 축구대회를 시작으로 1933년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축구의 조직화가 이루어졌죠.

 

 

이렇게 축구가 전파된 지는 꽤 오래됐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으로 인해 반세기 이상을 스포츠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 걸쳐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대별로 스포츠 스타 한 명씩은 꼭 나타났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축구 하나로 대한민국을 널리 알린 축구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차.범.근.입니다. 탄탄한 말벅지를 가지고 힘차게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의 실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축구 강국 독일에서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요?

 

1. 한국 축구선수 최초로 센추리클럽 가입

센추리클럽은 피파에서 인정한 A매치(국가대표팀 간의 경기)를 100경기 이상 출장해야만 가입할 수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에 따르면 차범근은 국가대표로 132경기를 출장해 59골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황선홍, 홍명보, 이운재)

 

참고로 A매치 최다 출장 기록 1위는 홍명보(136경기), 2위가 이운재(133경기)이며, A매치 최다 골 순위는 1위 차범근(59골), 2위 황선홍(50골), 3위 박이천(36골)입니다.

 

2. 독일 정부로부터의 시민권 제의

(▲고속 질주 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골을 때려 넣는 차범근)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차범근은 1977년부터 1986년까지 10년간 분데스리가에서 중앙, 측면 할 것 없이 날카로운 공격수로서 활약했습니다. 분데스리가에서만 98골을 기록했는데요. UEFA 우승컵을 2번이나 들어 올리기도 했습니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거의 폭격 수준으로 마치 휘모리장단에 몸을 맡긴 듯 공격을 휘몰아치다 보니 차붐(Cha Boom)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죠. 차범근에게 욕심이 생긴 독일에서 시민권까지 제의하며 독일에 머무를 것을 권유했지만, 한국의 축구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거부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3. 분데스리가의 클럽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전설로 인정한 차붐

'U반 슈타치온 빌리-브란트-플라츠'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역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심장부를 연결하는 지하철역입니다. 때문에 현지인과 관광객으로 많이 붐빈다고 하는데요. 이 역에는 '프랑크푸르트의 수호자'라는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그곳에는 '프랑크푸르트의 전설적인 선수 11명'의 인물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차범근입니다.

 

 

4. 마테우스도 놀란 차범근의 허벅지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 전성기 때 차범근의 허벅지 둘레는 31인치(78.74cm)였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축구 레전드가 된 독일의 마테우스는 차범근에게 "차붐 당신을 처음 봤을 때 허벅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허벅지라고는 믿기 어려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쳇말로 실화라고는 믿기 어려웠던 것이죠.

 

(▲말벅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간 스피드를 이용해 수비수를 순식간에 제치고 골을 넣는 차범근)

 

그런 그의 잘 발달된 탄탄한 허벅지는 수비수를 압도하는 폭발적인 스피드의 드리블과 함께 강력한 슈팅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5. 독일에 유학을 간 한국 유학생의 일화

독일로 유학을 떠난 한국 유학생이 입국 심사를 받던 중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입국 심사관이 "차붐의 나라에서 오셨군요? 차붐은 잘 있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유학생은 "네. 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입국 심사관은 유학생의 대답을 듣자마자 "통과"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6. 외국인 선수 최초로 분데스리가 전광판에 외국어 표기

애석하게도 자료 사진을 찾지는 못했습니다만,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외국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차범근이 골을 넣으면 전광판에 '차범근'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한글로 적어줬다고 합니다. 분데스리가에서 그를 어떤 선수로 평가했고, 대우해줬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는데요.

 

전광판에 차범근이라는 이름이 새겨질 때마다 독일에 살던 교민들은 눈시울을 적셨다고 하죠. 참고로 1960~70년대 해외인력 수출을 목적으로 독일에 파견된 근로자(광부, 간호사)는 약 2만 명 정도였습니다.

 

(▲붐이형!? 정말 붐이형 맞아요?? 오마이갓!)

 

(▲"정말 훌륭한 선수였고,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지금도 차범근 씨를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시민)

 

이외에도 분데스리가 경기 관람 중 차범근이 카메라에 비추자 관중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가 하면, 독일의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미하엘 발락이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나라에 방문했을 때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은 하지 않은 채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너무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라는 말을 먼저 했던 일화는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실 스포츠 하나로 자신의 조국을 알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재능뿐만 아니라 정말 이를 악문 피나는 노력이 있어도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지만, 앞으로도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탄생해 스포츠 외교의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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